월요단상

월요斷想[빛과 그늘]

효관 2022. 5. 1. 21:26

월요斷想[빛과 그늘]

 

최근 국회의 입법과정에 있어 국민의 뜻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질타가 높게 표출되고 있습니다.

필자가 월요斷想을 쓰면서 정치적 논제는 가능한 배제한다는 약속과는 다르게, 고도의 정치적 수단으로서의 입법에 대하여 생각해 보는 그런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제레미 벤덤(Jeremy Bentham, 1748~1832)과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은 공리주의의 기초를 세운 이론가들로 평가되는 영국의 대표적 사상가들입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주장한 제레미 벤덤의 뒤를 이은 공리주의자 존 스튜어트 밀은 반대 의견을 낼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옹호하면, 장기적으로 사회가 행복해 진다고 믿었습니다.

그 이유는 반대 의견의 전부 또는 일부가 사실일 수 있고, 그렇다면 다수의 의견도 수정할 수 있다는 것인데, 설사 사실이 아니라 하더라도 다수 의견과 소수의 의견이 치열하게 맞서다 보면 사회가 다수에 의해 독단이나 편견에 빠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빛과 그늘

빛과 어둠의 공존-그늘(글쓴이 김규봉)의 글을 인용하면, 빛과 어둠은 공존할 수 없지만, 단 한 곳 예 외가 있는데, 그곳이 바로 그늘입니다.

그늘이란 빛을 가로막는 물체 뒤까지 빛이 전달되어 생기는 빛과 어둠의 공존 구역입니다.

사람들이 선악을 빛과 어둠에 곧잘 비유하고 있는데, 절대적 선도, 절대적 악도 없습니다.

선악이란 어떤 특정한 행위보다 행위를 초래한 상황의 종속변수로서 빛이 반드시 선이고, 어둠이 반드시 악이 아니라 모든 행위는 근본적으로 그늘처럼 선악이 중첩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빛과 그늘에 대한 개념은 동서양에 공통적으로 나타납니다.

서양에서는 판도라의 이야기를 빌려 인간의 본성을 선과 악으로 구분하였고, 동양에서는 자연의 이치를 빌려 음과 양으로 대표했습니다.

음은 그림자이고 양은 빛으로 비유 확대는 빛을 삶과 희망과 흰색에, 그림자는 죽음과 절망과 검은색에 비유하였고, 심지어 우월과 열등, 선과 악, 하늘과 지옥 등으로까지 비화하기도 하였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서 빛과 어둠, 그리고 그늘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최근 국회 입법과정을 보면서 자연현상이 시사하는 그늘과 같이 선과 악, 빛과 어둠, 삶과 죽음과 같이 모든 현상이 본질적으로 둘이 아님을 공유할 때, 악법이라고 인식하는 그런 법에도 그늘이라는 존재의 또 다른 모습이 있음을 정치인들은 크게 인식해야 합니다.

청나라 주석수(朱錫綬)의 청언집 유몽속영(幽夢續影)에는 이런 글이 있습니다.

雪之妙在能積, 雲之妙在不留, 月之妙在有圓有缺

눈의 아름다움은 쌓이는 데 있고, 구름의 아름다움은 머물지 않는 데 있으며, 달의 아름다움은 찼다가 이지러졌다가 하는 데 있다고 읊었습니다.

빛과 그림자를 이분법으로 보지 않고 만물의 중첩을 통해 바라본 유몽속영(幽夢續影)의 글귀는 빛이 강할수록 그늘이 짙어지는 동서고금의 진리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번 주는 모든 만물이 낙화처여실(落花處餘實/꽃 진 자리에 열매를 맺는다)과 같이 모든 것은 순리가 있음을 명심하는 그런 한주였으면 합니다.

 

085/20220502

曉觀山房에서

仁潭合掌

 

'월요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월요斷想[아리랑]  (0) 2022.05.15
월요斷想[燃燈]  (0) 2022.05.08
월요斷想[生死]  (0) 2022.04.23
월요斷想[菜根譚]  (0) 2022.04.17
월요斷想[難得糊塗]  (0) 2022.04.10